• 최종편집 2024-03-29(금)
 
[신주현 호서대학교 법경찰행정학부 특임교수 기고] =고향이란 단순히 태어나고 자란 곳이 아니라 마음 속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곳이라고 한다. 눈감으면 떠오르는 낯익고 정겨운 동네, 어릴 적 모든 기억과 삶이 녹아있는 필자의 고향은 논산시 강경이다.
신주현.jpg▲ [신주현 호서대학교 법경찰행정학부 특임교수 ]
 
예로부터 강경은 우리나라 3대 시장의 하나이자 2대 포구로 그 전성기에는 거주인구가 3만여 명, 유동인구는 10만여 명에 달한 근대문화의 발상지라 할 수 있는 곳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비교적 일찍이 기독교가 전파된 곳으로 한국 최초의 침례교회인 강경침례교회와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한 강경성결교회가 소재한 곳이기도 하다.
 
필자는 어린 시절 학업 때문에 부모님과 떨어져 오랫동안 독실한 기독교인이신 외할머니와 함께 지냈었는데 그 때 외할머니로부터 안순득 여사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들었던 기억이 난다.

안순득 여사의 전도로 교회에 나가게 되신 외할머니는 당시 속장 직책을 맡고 계신 안순득 여사와 함께 심방을 다니곤 하셨는데 안순득 여사는 심방을 하시다가도 점심 때가 되면 집으로 달려가 아랫목 담요에 덮어 둔 따뜻한 밥을 남편께 정성껏 차려드리고 다시 심방하러 오셨고 여성애국운동도 열심히 하셨으며 공산폭도들에 죽는 순간까지도 나라를 위하여 만세를 외치면서 돌아가셨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강경 옥녀봉에 있는 안순득 여사 추모비에 의하면 안순득 여사는 당시 강경을 점령한 북한군의 끔찍한 고문과 협박, 회유에도 불구하고 배교(背敎)와 협력을 당차게 거부하고 마지막 죽음의 순간까지 믿음을 지키시며 애국가와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후 하나님께서 저들의 죄를 용서해주실 것과 자신의 최후를 맡기는 기도를 하시다가 공산폭도들의 일곱 발 총탄에 맞아 순국 순교하셨다고 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용기가 없다. 특히 용감한 드보라 여사는 하나님을 착실히 믿는 중에는 아무 것도 두려울 것이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 라는 안순득 여사의 당시 교회공과공부 설교기록에서 보여 지듯이 이는 오직 예수만 바라보며 살아가는 우직하고도 굳건한 믿음의 소유자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조그만 이익에 눈이 멀어 자신의 원칙과 절개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세상에 영합하는 것을 ‘유연성’이라 포장하며 살고 있는 우리 후세들에게 안순득 여사의 이러한 우직한 믿음과 소신은 세상엔 어떠한 상황에서도 절대 구부려서는 안 될 원칙과 정도라는 것이 있음을 깊이 깨우쳐줍니다.
 
안순득 여사는 고통과 죽음 속에서 의미를 발견할 줄 아는 분이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혀 죽음의 벼랑 끝에서 살아나온 유태인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은 ‘고통 속에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한 인간은 그 어떤 고통이라도 기꺼이 받아들인다.’라고 술회합니다.

당시 빅터 프랭클은 나치에 의해 수많은 유태인과 함께 나치의 강제수용소에 끌려갔는데 이들 중 빅터 프랭클을 비롯하여 소수만 살아남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수용소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죽습니다.

그가 말하는 아우슈비츠는 일상적인 욕설과 폭행, 비위생적인 환경과 혹한, 끝없이 이어지는 굶주림, 체력의 한계를 시험하는 강제노동, 옆에서 죽어가는 동료와 어디서 죽었을지도 모르는 가족에 대한 연민, 죽음이 자기 자신에게도 언제 닥쳐올지 모른다는 사실이 주는 미칠 듯한 공포 등 최악의 고통과 불안과 절망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가 내린 결론은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나이가 젊거나 튼튼한 근육이 있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삶과 경험에서 어떤 뚜렷한 목적과 의미를 발견함으로써 이에 맞설 힘을 얻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마찬가지로 안순득 여사께서 공산폭도들의 모진 고문과 회유, 죽음에 대한 두려움를 극복하고 순국순교하신 것도 역시 고통과 죽음 속에서 그 어떤 숭고한 의미와 깨달음을 발견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고통과 죽음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과의 차이는 고통과 죽음을 견디고 마주하는 자세가 다를 수밖에 없고 이는 인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험난한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시사(示唆)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고장 역사의 한 페이지로 기록될 안순득 여사의 행장기록이나 구전되는 내용이 슬쩍 편린(片鱗)으로만 남아있어 아쉬움이 크지만 그런대로 어느 정도의 인물부조(人物浮彫)는 되어있어 안개 속에서처럼 부옇게 떠올라 안타깝고 서운한 마음을 더해줍니다.
 
끝까지 신앙의 절개를 지키며 불의에 굴복하지 않은 안순득 여사의 순국순교의 모습이 오랫동안 강경지역사회에서 구전되어 오다가 1974년 지역 주민들에 의해 강경 옥녀봉에 추모비가 세워졌으니 안순득 여사의 순국순교정신과 죽음에 임박한 마지막 사생문답(死生問答)은 우리 지역 후손들에게 잊혀지지 않는 교훈으로 그리고 근대강경역사문화의 한 페이지로 영원히 기록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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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현 호서대학교 법경찰행정학부 특임교수 특별 기고] 두려움에 맞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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